머릿속의 지우개
머릿속의 지우개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17.04.0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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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희 수필가.

라디오에서 진행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데이터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떤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화번호, 컴퓨터나 USB에 저장되어 있는 많은 자료들이 모두 없어진 순간을 상상해 보니 너무 끔찍했다.

우선 휴대폰 속의 전화번호가 다 사라지면 나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까? 겨우 외울 수 있는 번호는 열 손가락안일 것이다. 편리함이 진행되면 될수록 우리는 뇌라는 공간보다는 기계라는 공간 속에 많은 것을 저장해 둔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뇌를 믿지 못해서 일까? 기억해야 될 것이 많아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기계 속에 넣어 놓은 걸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사람노릇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적이 있다. 사회의 한 일원으로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순간순간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가정의 대소사, 사회생활에서는 업무에 대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신뢰를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기억해야 하고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상대에게 얘기해줘야 했다. 그래야 상대방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가끔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또,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들은 왜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지 짜증이 난다. 그럴 땐 머릿속을 깨끗하게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사치였다.며칠 전 올케언니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친정엄마가 술 챈 사람처럼 몸을 잘 못 가눠서 자꾸 넘어지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팔십이 넘은 노모는 드시는 약만도 한주먹이다. 고혈압, 당뇨, 심근경색, 부정맥, 심장질환, 치매 약까지 드신다. 그래서 늘 건강이 걱정되는 나이시다.

치매는 초기라서 그리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딴소리를 하시거나 방금 있었던 일도 까먹기도 하신다. 그래도 잠깐씩 그러시는 거라서 크게 걱정은 안했는데 이번 전화를 받고 나니 걱정이 되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 가서 각종 검사를 다했지만 별 이상이 없다며 약을 많이 드셔서 그러니 약을 따로 보관하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집으로 오셨다. 약을 드시고 먹은 것이 기억이 나지 않아 또 드셨던 모양이었다.

그런 친정엄마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가끔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온갖 나쁜 짓은 다 해놓고 그 일이 밝혀져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을 때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 기억을 잃은 사람의 표정은 세상의 근심 걱정이 없이 평온해 보인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주인공이 기억을 잃어버려서 다행이라는 표현을 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억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뇌는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은 잊어버리면서 기억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말은 도리어 더 생생해진다는 연구 결과를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기억 속엔 좋은 기억보다는 좋지 않은 기억이 더 많다고 느낄 때가 있다.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는 지우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점점 뇌가 쇠퇴해져 기억을 잃어가는 친정엄마를 보니 기억할 수 있는 건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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