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병막산 산책길에서)
행복(병막산 산책길에서)
  • 음성뉴스
  • 승인 2017.12.2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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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선 수필가.

칡넝쿨을 보면 사람 사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지만 긴 줄기를 따라 꽃도 피고 지고, 잎도 피고 진다. 숲속을 산책하다 보면 만나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요즘은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내가 다니는 산책길은 이십년이 넘어도 정상에 운동기구 몇 개 놓인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다. 사람들은 등산 장비를 갖추고 숲길을 오가기도 하지만 난 편안한 차림으로 산에 가곤 한다. 시간이나 날을 따로 정해서 가지 않고 수시로 갈 수 있을 때 간다. 등산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한 것 같아 산책이라고 표현을 하면 내심 기분이 좋다.

병막산은 우리집 뒤에 있는 산이다. 왕복 1시간 정도 걸리는 가벼운 산책길이다. 그래도 평지 산책길과는 다르게 계단도 있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평지로 이어지는 길로 제법 운동이 되는 코스다. 산책을 하다보면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시간만 나면 데리고 올라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싱싱한 나뭇잎 같았던 엄마와 나비처럼 팔랑거리던 아이들이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작은 일에도 까르르 웃고 떠들며 평지처럼 단숨에 오르내리던 언덕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아이들이 커서 타지의 학교로 나가면서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음에 휴식이 필요할 때 산책을 한다. 산은 내 마음이다. 내가 기쁠 때는 산도 기뻐해주고 슬프다고 하면 같이 슬퍼해준다. 어느새 내 머리에도 이슬이 내려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언제나 검을 줄만 알았던 머리도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 정직하다.

내일도 모레도 산은 그냥 있는데 나만 변할 것이다. 아니다, 산은 그냥 있지만 산속에는 변화가 있을 것이다. 작은 풀도 새로 나고 오래된 것은 죽고, 나무도 오래되면 비바람에 꺾이고 휘어진 것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사람처럼 표현을 할 수 없으니 우리는 늘 그대로라고 마음대로 생각한다.

청설모 한 마리가 사색에 잠긴 나를 놀라게 한다. 저도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후다닥 나무 위로 올라간다. 우리의 사계가 뚜렷하듯 이 곳 산책길도 사시사철 같을 때가 없다. 껍질이 심하게 벗겨진 소나무 앞 벤치에 앉는다. 땀을 닦으며 숲을 바라본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속상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된 듯 숲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지난 겨울 쓰러져 누워있는 소나무와 껍질 벗겨진 소나무가 신경에 거슬린다. 한번 벗겨진 껍질은 재생되지 않는 것 같다. 흉터같아 보는 이의 마음이 짠하다. 싱싱하게 푸르르던 가지는 빛을 잃고 껍질도 노쇠하여 흉하게 벗겨지고 허리는 마음대로 굽어져 있다.

그래도 한때는 이 산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훌륭히 해냈을 텐데, 옛날은 돌아보지 않고 지금의 예쁘지 않은 모습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사람도 늙으면 저 소나무와 같아지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푸른 소나무처럼 가정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자식에게 모두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 앉아있으면 과거의 영광은 보이질 않는다.

잠시 어지러웠던 마음은 산책길에서 흩어지고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봄처럼 예뻤던 어린시절,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쳤던 젊은 여름도 지나고 지금은 품위와 멋을 지닌 가을이다.
나는 멋과 품위를 지닌 가을을 안고 돌아온다. 머지않아 다가올 순백의 아름다운 겨울은 조금 더 있다가 맞이하고 오늘은 가을만 안고 온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주문처럼 자꾸 읊조린다. 언젠가는 겨울을 데리러 가게 될 뒷산이 있으니 그것 또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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